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쑨원-위안스카이 회담 (문단 편집) ===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만남 === 1912년 8월 24일, 부인을 대동한 쑨원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수많은 베이징 시민들이 몰려나와 쑨원을 환영했고 위안스카이도 쑨원을 전직 대총통의 예로 극진히 모시며 쌍두마차를 보내 영빈관으로 초대했다. 위안스카이의 비서장 [[량스이]]를 포함하여 모든 총장들이 마중을 나가 쑨원을 영접했고 쑨원은 8월 24일 저녁, 총통부를 찾아가 위안스카이를 만났는데 이것이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만난 첫 대면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환영사에서 쑨원을 치켜올리며 쑨원의 처음 뜻과 소망을 저버리지 않겠으니 많은 가르침을 달라고 겸손하게 발언했다. 쑨원도 혁명당 인사들에게 위안스카이는 이제 민국에 충성하는 인물이니 함부로 비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후 국무원에서 총 13차례에 걸쳐서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회담이 행해졌다. 국무총리 대행 [[자오빙쥔]]과 육군총장 [[돤치루이]] 등 각부 총장들 및 비서장 [[량스이]]가 언제나 동석했으며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행한 헨리 조지의 <단세론> 강의를 포함, 말하는 의견 대부분에 찬성을 표하였고 이견이 있을 때에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으니 참고하겠습니다."라며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위안스카이의 태도가 수상쩍을 정도로 공손한지라 쑨원은 의심을 품고 량스이에게 몇마디 질문을 했으나 음모의 징조를 포착할 수는 없었다. 8월 25일, 국민당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쑨원이 이사장에 선출되었는데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도 국민당 입장을 권하며 만약 그가 국민당에 입당한다면 국민당의 영수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9월 9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전국 철도를 기획하는 전권을 부여하며 3만원의 월급과 상하이의 사무실을 약속했고 쑨원은 이를 수락했다. 한편 장전우에 대한 얘기를 나눈 쑨원은 황싱에게 장전우 사건을 더 이상 키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 장전우 사건은 그대로 묻히게 되었다. 9월 11일에는 황싱이 베이징에 도착해 쑨원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